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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 1편

우리가 꿈을 꾸잖아요. 꿈의 세계 속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꿈속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있겠죠. 착한 사람도 있고 좀 악한 사람도 있고 또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도 있겠죠. 꿈속에도 보면 아주 지혜로운 환자들도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지식과 지혜

 

그럼 이제 꿈속에서 막 꿈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내가 지혜를 많이 담고 하면 꿈의 세계를 더 잘 살 수 있겠죠. 꿈의 세계를 지식이 늘어나면 꿈의 세계 속에서 내가 더 좋은 직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지혜로우면 자식을 더 지혜롭게 잘 키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다양한 어떤, 그 꿈의 세계 속에서 지식과 지혜를 늘려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삶이 풍요로워지고 더 삶이었던 좀 지혜로워지겠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겠죠. 그죠, 이걸 이제 '지식'이나 '지혜'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지금 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 세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식을 키울 때 보통 지혜가 없으면 지식만 있으면 지식은 있지만 지혜가 없으면 자기는 자식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식을 좀 폭력적으로 괴롭힌 것일 수도 있겠죠.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면서, 공부 잘 하는 게 너에게는 가장. 중요한 거야, 내가 나를 위해서 공부시키니 너를 위해 공부시키니, 공부 잘하면 내가 좋니, 너가 좋지. 그 맞는 말이죠. 근데 그것이 항상 과해지면, 그게 오히려 잘못된 지혜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처럼 내가 조금 더 지혜로우면 어떤 삶을 사는데 있어서,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지혜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 반야는 뭐냐? 반야지에는 뭐냐? 이거는 꿈속 세계 속에서 지혜로운 꿈을 꾸는 것이 아니고, 꿈을 깨는 지혜입니다. 우리도 지금 다 꿈을 꾸고 있어요. 지금 자기 의식의 꿈을 꾸고 있어요. 교리적으로 말하면, 보는 나도 실제하고, 보이는 것도 실재하고 봐서 아는이 의식도 실재한다.

 

이렇게 우리는 착각하면서, 그걸 진짜라고 여기며 살아왔단 말이죠. 그게 꿈인 줄 모르고, 어, 저는 진짜 아는데요. 제가 다니는 직장은 대기업이고 월급도 많이 주고 좋은 직장이고 이걸 제가 알아요. 제 남편은 참 훌륭한 남편이고, 아니면 좀 마음에 안든 남편이고, 세상은 이렇게 돼야 되는데, 저렇게 잘못되고 있고,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해요.

 

현실 속 메타버스

왜 그러냐면, 자기가 아는 그 세계 속에, 자기 혼자 사로잡혀서, 그 의식 속에 빠져 가지고, 그 의식이 펼쳐 놓은 가상현실, 의식이 펼쳐놓은 가상현실이에요. 이게 메타버스예요. 생생한 메타버스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게 메타버스인데, 자기랑 비슷한 거를 자꾸 구현해 내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제 직장을 딱 나갔는데 아침에 회사를 탁 나갔는데 직장 상사가 장사 중에 누가 한 명이 막 미리 청소도 해놓고 회사 커피도 한잔 맛있게 타 놓고 내가 탄 커피라고 맛있다고 하면서 한잔 먹어보라고 갖다 주고 뭐 이렇게 되게 따뜻하게 해준대요.

 

그리고 오늘 입은 옷도 예쁘네요 하고 머리를 바꿨는데, 남편은 전혀 모르는데, 그 사람이 알더래요. 머리 다시 하셨네요 이렇게 알더라는 거예요. 태어나서 그렇게 챙겨주던 직장 상사가 있는데 집에 갔더니 배는 불뚝 나와 가지고 꾸역꾸역 돼지처럼 소리를 내면서 막 쩝쩝 소리를 내면서.

 

그래서 이 남편은 매력도 없고 옛날에 내가 콩깍지에 꼈지 매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내가 봤을 때 정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옛날에 장점이라고 느꼈던 게 지금 보니까 다 단점인데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면서. 이 사람 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직장 가서 그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내 관념 속에서 내 분별 속에서 그렇게 인식을 했단 말이에요. 근데 그걸 진실이라고 할 수 있냔 말이죠. 진짜 내가 진짜 본 게 맞는지 확인할 수 있냔 말이죠. 내가 그렇게 본 거죠. 내가 이런 남편을 그렇게 바라본 거죠.

 

어쩌면 이럴 수도 있죠. 남편이 나에게는 이렇게 하는데, 직장 가면 그렇게 둘도 없이 따뜻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능력도 있고 성격 좋고 직장에 있는 여 사원들은 '우리 과장님', '우리 부장님' 진짜 멋있다. 저런 사람과 같이 사는 아내분은 얼마나 행복하실까 이럴 수도 있겠죠.

 

사람들이 나는 평생 살아도 내 남편을 진짜로 알 수 없다, 경험하지 못한다. 진짜 남편은 못 본다. 이거죠. 진짜 자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잘 보기 쉽지 않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진짜로 알 수 없어요.

 

노래는 안다고 생각해, 난 내 남편 아는데, 내 남편의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내가 그렇게 본 거잖아요. 이제 뭐, 어떤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어떤 보살님이 집에만 있다가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이제 직장을 가야 되겠다 하면서 이제 직장을 애들 막 키우고 막 힘들게 지내다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직장을 딱 나갔는데 집에서 맨날 남편이 회사 갔다 오면 잔소리하고 밥 달라고 맨날 이런 반찬밖에 없냐고 바가지를 끌으신데요. 이런 남편은 나에게만 있어 이 우주에 내가 창조했으니까, 남편이 마음에 들든 마음에 안 들든 이 사람은 내가 만들어서 나에게만 있단 말이에요.

 

마음공부를 하고 정말 공부를 익어가면서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런 얘기를 하세요. 처음에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절에 가서 뭐 공부한다 되고 기도한다 되고 뭐 이러길래 그 절에 가서 뭐 하냐 맨날 저희가 돈만 쓰고 이랬다는 거죠.

 

근데 어느 날부턴가 보니까 공부를 선도 한 달이고 마음공부 한 달이고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사람이 달라졌다. 그런데. 30년 전에 너무 설레여 가지고, 이 남자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때는 막 좋아 죽을 것 같았는데, 30년 살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놈하고 이혼을 할까, 어떻게 하면 너무 괴로웠다는 거야, 너무 미웠다는 거예요,

 

하나하나가 너무 매웠다는 거예요, 근데 30년 만에 30년 전에 내 남자를 되찾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도 봤어요. 어떻게 하길래 그러세요 했더니, 이 사람이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막 마음공부에 꽂혀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안 믿었대요.

 

저렇게 해봐야 뭐 달라질게 있겠나, 하나도 안 달라지겠지. 그렇게 느꼈다는 거죠. 그런데 뭔가 공부가 이렇게 익어가는데, 정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확 바뀌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보던 내 관념이 또 확 달라질 수 있겠죠.

 

한 순간의 소중함

근데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마음이 확 떠나는게 한순간이에요, 한마디 말 때문에 마음이 확 떠나 버려요.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그 사람의 행동 하나 때문에 확 뒤바뀌게 돼요. 안 좋은 이미지로 확 바뀌기도 해요.

 

어쩌면 그것을 본 내가 오해한 걸 수도 있는데, 그 전체를 못 보고 그 행동 하나를 보고 아, 저 사람 나쁜 놈이었네.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이 진짜 착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남들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에 나의 착하지 않은 부분을 나는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 나는 착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못한 사람일까요? 겉으로는 나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았어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어서 착한 데를 많이 하고 살았어요. 근데 속마음은 항상 폭발할 것 같아요. 이제는 더 이상 못할 것 같아요.

 

근데 내 업습 때문에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왜 착한 사람으로 남지 않으면, 남들에게 욕먹을까 봐, 남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배신당할까 봐. 그건 내가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착한이 정체성을 쥐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은 진짜 착한 사람이냔 말이에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별지에 불과해요. 근데 우리는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더 잘 알기 위해서 공부하고 살잖아요. 그걸 불교 교리적용으로는 시계 증장이라고 그래요. 경험이 많으면 공부가 많고 삶의 경험이 많으면 의식시기 증장이에요.

 

즉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서 뭐가 더 좋은지, 뭐가 더 잘났는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은 커져요. 근데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정치라는 일을 하는 분들은 필연적으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혜롭다면, "아, 내가 아는 생각이 100%" 이건 분별지일 뿐이야. 완전한 지혜가 아니야, 반야지혜가 아니야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지혜죠. 그러면 정치인들을 욕을 할 수는 있겠죠, 반박하고 비판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죽도록 욕하지는 않겠죠. 그리고 저 사람 극단적으로 막 미워하지는 않겠죠. 왜냐면, 그 뜻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또 내 생각과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구나.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거죠.

 

옛날에 우리는 뭐 소시지를 먹으면 영양가 있는 걸 먹는 거라고 생각했잖아요. 김치나 된장찌개 이런 거나 먹으면 별로라고 생각하고, 맨날 잡곡밥, 보리밥을 먹으면 영양이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소세지는 이건 가공식품이라 정크푸드라 부르잖아요. 근데 오히려 잡곡밥에다가 된장찌개는 진짜 영양식이에요.

 

학문도 그런 자세로 공부해야죠. 편견을 가지고 내가 하는 학문이 이건 절대적으로 오라고 하면 더 이상 공부 진도가 안 나갑니다. 모를뿐 하는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내가 오류일 수도 있다라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되는 게 맞잖아요.

 

일반 학문에서도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내가 맞다, 나는 틀릴 수 있다. 어떤 특정한 견해에 대해서 나는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게 지식에 대한 오류입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하다 못해, 여러분이 집에 갈 때 맨날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지하철이 더 좋은지 버스가 더 좋은지? 아님, 지하철에도 빠른지 버스가 더 빠른지 알 수 있습니까? 인연은 알 수가 없어요. 이게 더 좋은 줄 알았는데, 그날 거기서 사고 날 수도 있어요.

 

이게 더 빠른 줄 알았는데, 그날 따라 이게 맞길 수도 있어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자식을 잘 키운다고 여기지만, 이게 오히려 못 키우는 걸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