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공상에 대한 깨달음 3편 이어서 하겠습니다. 화두가 저절로 들려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스님들이 늘 이런 법문을 하니까, 도대체 저게 뭘 얘기하는 걸까, 나도 한번 알고 싶다. 제법이 공상이라는데 이렇게 제법이 전부 다 공상이라는데, 나는 허상. 내가 만들어낸 이 컵이라는 상만 보인다는 말이죠. 이게 왜 공상일까? 이게 왜 공상일까? 궁금함을 안으로 품고 이걸 진짜 내가 금생에 해결하겠다 하고 마음을 내는 것, 그게 선 공부입니다.
제법에 대한 불교적 관점
근데 이렇게 마음을 낸 채 계속 법문의 귀 울리는 것 그러다 보면 저절로 막 궁금해지고 저절로 답답해지고 그래서 어느 순간 이것이 무르익으면 시절 인연을 만나면 쑥 내려가는 이 자리를 한번 여기서 공을 한번 확인하는 그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것을 뭐 선에서는 견성이라고도 하고 혹은 일별이라고도 하고 다양한 말로 표현을 해요. 그래서 이렇게 이 세 번째 의미는 제법공상의 세 번째 의미는 제법은 공이면서 상이란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여기서 상만 보지만 여기서 공을 확인해야 된다. 이렇게 시제법 공상은 어떤 모습이냐 특성을 지닌다는 말이죠.
우리는 제법에 허상만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제법은 저마다, 제법은 우리가 보는 제법은 어떠냐면요, 생겨난 모든 것들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을 우리가 보는 허상은 어떤 모양이냐 하면 이것도 제법이잖아요. 나도 인연 따라 생겨났잖아요.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내가 태어났잖아요.
부모님이라는 인연 따라 내가 이렇게 태어났단 말이에요. 인연따라 생겨났어요. 나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느냐. 이 볼펜도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죠. 이 책도 인연 따라 출판사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거겠죠.
이 법당도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죠. 이 제법은 전부 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공상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공상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특징을 지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생멸한다고 생각했지 불생불멸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왜 중생들은 허상을 진짜라고 여기면서 살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내가 태어났고 나는 살고 있고 언젠간 나는 죽을 거야라는 생각. 그것은 공상을 깨닫지 못한 생각이에요. 제법에서 이 공을 보지 못하고 상만 보고 있는 거예요. 실상의 눈 뜨지 못하고 허상만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금강경에서도 약견재상 비상이면 즉견여래라고 했어요. 열애를 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만약에 본다면 재상이 비상임을 온다면 세상. 이게 제법이에요. 금강경에서는 재상 비상이라고 했고 법화경에서는 제법 실상이라고 했고 반야심경은 제법 공상이라고 했단 말이죠.
즉, 재상 모든 상은 비상 상이 없단 말이죠. 공상이라는 말이거든요. 이 말이 이것의 눈 뜨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보세요 자기 몸을 보고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해요. 내 몸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걸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상을 부여한 거예요. 상을 부여할 때 어떻게 부여하느냐 하면 불교에서는 명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름 명자의 모양 상자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이 제법을 제법에다가 모양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며 살았어요. 그걸 명상이라고 불러요. 이름과 모양을 부여하는 거죠. 이것을 이런 모양을 보여주고 갓난아기에게 커비와 컵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그럼 이 컵이라는 이름 컵이라는 소리 파장과 이렇게 생긴 모양을 동일시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여러분 컵, 컵이 진짜이 겁니까? 컵이라는 말이 이겁니다. 밥 밥이라는 말이 진짜 밥입니까? 밥 밥하면 배가 부른가요. 밥 밥 백반 천 번의 배가 안 불러요. 밥을 진짜 먹어야 배가 부르지, 그 실제로는 '밥'이라는 것은 모양이고 이름이잖아요. 그 '밥'이라는 모양과 이름, 그게 밥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밥'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그 '밥' 그것과 동일시 한단 말이에요.
불생불멸
근데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당연히 생겨나고 사라지는 거지, 그게 아니란 말이야. 생겨난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단 말이야.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느껴지잖아요. 근데 그게 시제법공상, 이러한 모든 것들의 공상, 공상인 모든 것들의 진실이에요.
이런 모든 것들은 공상이기 때문에 불생불멸하는 것들입니다. 우리 눈으로는 불생불멸하는 걸로 안 보이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이제 답답한 거예요. 왜 불생불멸이지? 내가 그러면 태어난 적도 없단 말이야. 내가 죽는 적도 없단 말이야. 맞습니다. 진짜 자기는 태어난 적이 없어요. 죽을 수가 없습니다.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서 이해하려고 했어요.
아, 뭐 양자물리학을 양자 물리학적으로 보면 뭐 세포가 왔다가 세포를 쪼개쪼개고 쪼개 보면 실제로는 그 안에 실제가 있는 게 아니고 파장이기도 하고 뭐 이런 식으로 막 해석하면서 그래가지고 내가 생멸이 아니라는 거겠지. 내지는 온갖 생각을 가지고 굴리지만 이럴 때 법을 설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그 불교의 핵심은 연기법이고 무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공사상이라고 또 이렇게 적립화 시켰어요. 이 몸은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죠. 앞에서 공부한 것처럼 오온이 인연 따라 화합했을 뿐입니다. 우리 몸도 인연 따라왔다 가는 거고. 이렇게 지금 계속해서 밥과 물을 마셔주는 인연을 통해서 내 몸이 유지가 되잖아요.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걸 통해서 내 몸이 유지가이 몸이 유지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몸은 독자적으로 혼자서이 몸이 아닌 거죠.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인 거예요. 10년 전, 20년 전에 내 몸과 지금 몸은 물질적 육신으로 봤을 때 전혀 다른 몸일 수 있죠. 근데 우리는 그때도 나라고 했고 지금도 나라고 한 뭔가 같은 나인 것 같은 어떤 부분이 있단 말이에요.
그럼 어느게 나죠. 몸이라든지 느낌, 생각, 의지의식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느냐.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해요. '아, 그러면 이 몸과 마음을 이끌고 가는 또 다른 어떤 이걸 이끌고 가는 어떤 실체가 있구나.' 그걸 보려면 목이라고 하는구나. 그걸 찾으면 되는구나. 해서 그거 찾으려고 이 몸과 마음을 끌고 다니는 놈 어딨 나 하고. 막 계속 찾는단 말이죠. 그게 따로 있지 않다는 거예요. 여기에 드러냈단 말이에요.
여기서 곧바로 확인되는 걸 찾아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아,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다 보니 이 세상 모든 것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니까. 자기라고 할 수 있냔 말이에요. 이 몸을 가지고 느낌, 생각, 의지, 의지를 가지고 자기라고 할 수 있냔 말이에요. 반야심경에서 지금까지 한 게 다 온 계공이라는 거잖아요. 이 몸은 마음은 내가 아니다는 거잖아요. 이게 내가 아닌 거예요.
그럼 이 몸과 마음이 아닌 진실은 공상이고, 공상 공해서 있다라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러 코니 저러쿵 이 할 수 없어요. 분별 상으로 보이는 어떤 모양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법은 이 진짜 자기는 진정한 자기는 모양이 아니라 모양을 떠난 이 법에 첫 번째 특성, 그것은 불생불멸이란 말이죠.
이 공상의 첫 번째 특성은, 그러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건 진짜가 아니에요,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표는 뭐겠어요? 실상을 확인하는 거잖아요. 실상의 눈 뜨는 거잖아요. 공상을 깨닫는 거거든요. 그러면 허상은 다 제쳐야죠. 허상은 몸 왔다가는 허상이잖아요. 느낌 왔다 가는 거잖아요. 생각 왔다 가는 거죠. 의지, 의지도 왔다 가죠.
의식, 분별의식 왔다 가요. 사람들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분별 의식이 다 다르고, 사람들마다 이 모양, 모양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 달라요. 그러니까 다른 건 실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왔다 가는 것에는 진실이 없구나. 왔다 가는 거에는 내가 집착할 필요가 없겠구나. 욕심부릴 필요가 없겠구나. 거기 사로잡힐 필요가 없겠구나가 분명 해지죠.
그러면 이 몸도 왔다. 가고, 나에게도 집착할 필요가 없죠. 아집을 가질 필요가 없죠. 내 생각에 고집할 필요가 없죠. 그 생각은 그냥 왔다 가는 생각일 뿐이죠. 몸과 마음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왔다 가는 것뿐이다. 생멸하는 것 뿐이잖아요. 생멸하는 건 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죽어도 내가 죽는 게 아닌 거예요. 이 몸이 죽는 거지. 그리고 이 몸은 매 순간 죽고 있고 살고 있고 몇 순간 순환하고 있는 거예요.
무생법
그냥 매 순간 내 몸의 일부가 빠져나가고 있고 또 일부가 새로 들어오고 있잖아요. 그게 조금 극적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 뿐이죠. 죽음이라는 것은 그러면 여기에 생멸하지 않는 거 왔다 가지 않는 거 그걸 찾아야 된다는 거죠. 그게 진짜 자기의 본래면목이라는 겁니다.
그걸 불생불멸법이라고도 하고 무생법인이라고도 해요. 무생 본래 태어난 바가 없다. 생한 바가 없다. 이게 바로 법에 도장이다. 이게 진짜 법이다 하는 소리죠. 진짜 법은 생겨난 바가 없고 사라지는 바가 없는 것이 진짜 법이다. 이런 소리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걸 나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자기가 없잖아요. 왔다 가는 거잖아요. 생멸법이잖아요. 그럼 내가 없어요. 고정 때 실체적인 자아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죽고 나서 윤회할까요 안 할까요.
윤회를 한다라거나 윤회 안 한다거나 하는 견해는 윤회를 윤회하면서 계속 반복돼 뭔가 영원히 반복되는 나의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그게 계속 반복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상견이라고 부릅니다. 항상 한다는 견해 아니면 죽거나 하면 끝이야. 윤회. 그런 거 없어. 죽고 나면 그냥 끝이 아무것도 없어. 제가 아는 어떤 분도 그러더라고요. 불교는 죽고 나면 끝이라는 종교야. 윤회 같은 거 없다고 말하는 종교야라고 해서. 죽으면 끝이야. 이게 불교야라고 믿어요.
그걸 보니까 단면론을 불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외로 많더라구요. 유명한 학자들이나 이런 분들 중에도 단면론을 불결하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이제 경전에 대지도로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어떤 의도들은 금색만을 말하면서 후생은 없다고 설하니이 사람의 삿된 소견은 단멸에 떨어진 것이며 어떤 사람은 금생과 후생을 말하면서도 금생에 정신 즉 신이 나 영혼이나 아트만 같은 이런 것들이 후생에 들어간다고 들어가면서 그게 계속 재생한다고 하니까 이 사람의 삿된 소견은 상견에 떨어진 것이다.
반야지해에서는 이 두 가지 치우친 견해인 양변을 여의고 중도를 설한다라고 대지도론에서 설하셨습니다. 즉, 이처럼 항상 한다는 것도 중도가 아니고, 딱 끊어진다는 것도 중독 아니란 말이에요. 윤회가 하느냐, 안 하느냐, 그 모두가 중도가 아니란 말이죠.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