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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공상에 대한 깨달음 2편

제법공상에 대한 깨달음 2편 시작합니다. 진실의 눈 뜨면 모든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부처님이 뭐 사주팔자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제가 어떻게 될까요, 제가 이 회사 투자를 할까요 말까요 하고 부처님께 물어보면, 아, 투자하십시오, 마십시오. 이렇게 답해 주는 사람일까요. 그런 걸 하는 분이 아니었죠.

 

기도에 대한 통찰

그리고 부처님은 사실 당신 인생조차 훤히 미래를 내다보고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차단하고 이런 일을 행하는 분이 아니잖아요. 부처님이 그런 일을 행한 분이었다면 목련 존자가 외도들에게 카레 맞아 죽기 전에 부처님이 미리 얘기해 줘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셨겠죠.

 

부처님 인생에서는 완전히 좋은 일만 일어났겠죠. 우리가 분별 내 눈으로 봤을 때도 좋은 일이 일어났겠죠, 근데 그렇지 않았단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처님의 현실은 우리가 분별의 눈으로 봤을 때는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여기는 건 왜 그럴까요? 이걸 잘 알아야 돼요. 이 사실을 알면 우리가 단순히 기복불교에서만 멈춰 있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죠. 기도해서 다 돼야 된다라는 것도 우리의 분별 망상이거든요. 내가 원하는 기도의 방향, 나는 기도를 통해서 내 아들이 A라는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하고 기도를 하잖아요.

 

자기 인연따라. 근데 우리는 그때 절망할 거예요. 부처님께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들어주셨다. 그러면서 괴로워할 수도 있겠죠. 근데 그걸 알 수 있느냐 말이에요. 그건 내 생각 판단이었을 뿐이잖아요. 내 생각에는 A대학 가는 것이 성공이고 삐대학 가는 건 실패라고 생각했을 수 있는데 그게 맞았냔 말이죠. 그게 맞을 수 없단 말이죠.

 

그래서 지혜의 눈 뜬다라는 것은 무분별지를 깨닫는 거예요. 분별지라고 해서 분별의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에는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딱 깨닫는 거예요. 삶은 알 수 없구나. 중중무진의 연기를 어떻게 내가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슈퍼 컴퓨터를 돌려도 중중무진 연기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서 절대 우리는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분별의 지식은 알 수 없구나라는 사실에 눈뜬 눈 뜨게 되면 드디어 무분별지라는 분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요.

 

그러면 내 인생이 이렇게 펼쳐지던 저렇게 펼쳐지든, 그동안은 내 머릿속에서 상을 가지고 분별을 가지고 '이건 좋은 일이고 저건 나쁜 일이야' 좋은 건 내 인생에 더 일어나야 되고, 싫은 건 일어나면 안 돼 하고' 상을 짓은 다음에 분별, 상을 지은 다음에 '이건 좋은 것, 저건 나쁜 거'라고 자기 머릿속에서 분별, 상을 짓고는 좋은 것은 더 집착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는 상의 얽매인 삶을 살아왔단 말이죠.

 

수행과 지혜

그 허상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왔단 말이죠. 그런데 지혜의 눈을 뜨면 연기법의 실상에 눈을 뜨게 되면, 이 제법 공상을 깨닫게 된단 말이죠. 제법은 공상이어서 나는 '이게 좋고 저게 싫은 줄' 알았지만, 알 수 없구나라는 사실에 눈 뜨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식대로 '이건 좋고 저건 싫다'라고 판단, 분별하지 않겠죠? 하기는 하더라도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않겠죠. 판단은 다 하면서도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의 실상은 공상인 줄 아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것을 가지려고도 하고, 싫은 것을 없애려고도 합니다. 인생에서 그러는데, 그게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집착은 없단 말이죠. 나는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거니까' 이걸 열심히 한다. 그러나 결과가 이게 좋을지 저게 좋을지는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결과는 완전히 맡겨 버리는 거예요.

 

저절로 그러니까 삶이 무게감이 사라지죠. 내가 안다라는 생각이 없으니까. 반드시 '이렇게 해야 되는 것'도 없고, 반드시 '저렇게 해야 되는 것'도 없고, 집착이 사라집니다. 탐심이 사라집니다. 내 뜻대로 안 돼서 화나는 일 진심 화내고. 성내는 마음도 사라지죠. 그 탐심과 진심이 사라지는 지기 때문에 지혜 치심이 없어서 지혜의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돼요. 지금 여기에 이 공상을 시 제법 공상을 논두게 되면 문제가 사라진단 말이죠. 아, 문제가 없구나. 삶은 이대로 완전했구나. 공상을 체득하는 것이죠. 이처럼 제법은 본래 공상이란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공상인 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 이건 이런 가치, 저건 저런 가치, 가치를 부여하고 옳고 그른 판단을 부여해서 어떤 건 쥐고 싶고 어떤 건 밀쳐내고 싶은 이런 허망 분별에 이끌려 살아왔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보니까 이렇게 설한단 말이죠. 시 제법은 공상이다. 제법이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공상이었단 말이죠.

 

이렇게 이제 두 번째로 제법은 공상이라는 의미로 쓰이고요. 이제 뭐, 이것도 같은 얘기긴 한데. 세 번째로는 일체, 모든 것들, 제법은 공이며 상이다. 제법 공상, 제법은 공이면서 상입니다. 근데 우리는 중생들은 이 제법에서 상만을 보는 거죠. 모양만을 취해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러다 분별하는 분별 상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중생이고. 이 드러난 이상에서 우리는 컵이라는 상을 보잖아요. 근데 여기서 법을 본단 말이죠.

 

공한 법의 실상을 본단 말이죠. 제법 실상을 마주하고 여기서 공상을 마주한단 말이죠. 그걸 성품을 확인한다. 공을 깨닫는다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모양만을 보는 게 아니라, 여기 동시에 드러나 있는 색즉시공이라 그랬잖아요. 이 세 개 들어가 있는 곧바로 드러나 있는 공을 본단 말이죠. 이 모양이 드러나 있는 곳에서 모양이 아닌 공이라는 실상을 확인한다.

 

그래서 직진심, 곧바로 직지한단 말이에요. 마음을 가리켜 보인다, 이렇게 '직지'인심 한단 말이, 마음을 보인단 말이에요. 법을 공상을 드러내 보인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여기서 공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을 본단 말이에요. 공을 드러내 보였는데, 여기서 '상만' 본단 말이죠.

 

법에 대한 이해

마음을 가리켜 보이는데, 여기서 자기의 분별만을 본단 말이죠. 그래서 이 마음공부라는 것은 이렇게 제법이 공이면서 상인데, 우리는 평생 토록 상만 보고 살아왔단 말이죠. 중생들은 여기서 스승이 가리켜 보이는 직진을 통해서, 계속해서 스승은 '이게 진리고, 이게 법이고, 이게 부처고, 이게 마음이다' 하고 가리켜 보인단 말이에요.

 

'직진심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분별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눈에는 이거는 '볼펜이에요', '명과 상, 이름과 모양'으로 이렇게 생긴 모양은 '볼펜이다'라고 우리는 머릿속에 항상 배워서 들어왔던 '분별상만을 취할' 수 있다 보니까, 여기서 우리는 '볼펜 아닌 것'은 보이지 못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게 볼펜으로 보입니까?', '마음으로 보입니까?', '이게 내 바깥에 있는 볼펜으로 보이나요?', '이게 내 본래 마음으로 보이나요?' 여러분, 이렇게 볼펜을 들어 올리는 여기에 자기 마음이 있어요, 여기에 법이 드러나 있단 말이에요.

 

스님들께서 이걸 이렇게 들어보이거나 죽비를 탁 들어 보이거나 주장자를 곰국 내려치실 때 그때 주장자를 내려치는 게 아닙니다. 법을 활발하게 작용되고 있는 이 법을 보여주는 거예요. 법을 가리키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법문을 하면 우리들은 답답해 죽겠는 거예요.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지금 볼펜을 들고 있으면서 이걸 부처라고 한단 말이야. 이걸 마음이고 이걸 진리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 저것이 법일까? 왜 저게 볼펜인데 저게 법일까 하고 궁금하기 시작합니다. 선생님께서 부처님께서 역대 조사 스님들께서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건데 그래서 믿음이 바탕이 돼야 되는 거예요.

 

저분이 거짓말하진 않을 텐데 저기 부처라고 하는데 왜 저것이 부처일까? 왜 저 부처를 나는 확인하지 못하는 것일까? 색즉공이라고 해서 색 속에 드러나 있는 곧바로 같이 함께 드러나 있는 공을 나는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궁금함, 답답함, 알고 싶은 이 먹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뭘까 하는 궁금함이 든단 말이죠.

 

그래서 이걸 내가 확실히 확인하고야 말겠다 하는 발심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대분심 맨날 이렇게 이게 법이라고 가르치는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근데 왜 나 못 알아듣지 이게 막 분하단 말이에요 억울하고 분하단 말이에요. 왜 나만 이걸 못 알아듣나 그 대신심 내 발 심대 분심대 의심이 일어난단 말이죠. 그런 체에 그냥 이걸 알고 싶은 마음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선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서 말씀드렸죠. 공상을 깨닫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별에서는 알 수 없다. 머리로는 알 수 없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법이에요. 근데 이거 법을 확인하려면 머리로 왜 법일까 하고 머리로 아무리 파악하고 분별하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막 논리적인 근거를 갖다 들이대 가지고 이걸 법이라는 근거를 들이대 봐야. 그거는 분별의 답일 뿐이기 때문에 절대 이것을 체득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을 수가 없다. 절대 깨달을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머리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거잖아요, 그죠. 그러면 오히려 다행스럽지 않나요.

 

이게 머리로 답을 낼 수 있는 거라면, 아 이거는 어마어마한 진리기 때문에 우리 같은, 저 같은 뭐 우리처럼 학교 다닐 때 그냥 공부들 그다지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사람은 절망할 수도 있어요. 최상위권 대학 나온 사람들은 머리로 하는 거면 야, 여기서 금방 깨달을 거 아니겠어요. 근데 이거는 다행스럽게도 머리로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머리가 샤프하게 잘 돌아가는 사람도 이게 법인 것을 못 깨달아요. 오히려 더 못 깨달아요. 습관이 없습이 머리로 굴리는 것만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일수록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일수록 더 확인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다행스럽죠 더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분별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생각 판단 분별을 탁 놔 버려야 된단 말이에요. 그냥 궁금한 마음, 간절한 궁금함 그것을 안으로 안으로 가지고 있어야 된단 말이죠. 그렇게 정말 알고 싶다. 정말 간절히 한번 나도 알고 싶다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그걸 가나선에서는 화두가 들려 있다 이런 표현을 써요. 3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