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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마음에 대한 철학적 해석 2편

공적 해요. 진공, 창으로 공해요.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없다는 측면을 먼저 사라는 거죠. 앞에서. 근데 그다음에 반드시 묘유, 묘하게 있다. 이게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묘하게 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있다, 없다를 넘어서서 서라는 가르침이에요. 공적영지, 공적 하다. 그런데 이렇게 소송여하게 아는, 알아차리는 이거 어떡할 거냐. 이거 무시할 수 없지 않으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단 말이죠.

 

개념과 분별의 차이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설법하고 계시는 무하가 곧 대승불교, 선불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진하고 여래장이에요. 우리 불교는 진제와 속제라 그래요. 진제라는 건 진짜 참된 진실이다. 근데 이 진제는 제1의제라고 해서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이렇게 들어 보일 수만 있지. 이렇게 가리켜 보일 수만 있지. 진제는 말로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말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속제, 세속적인 분별의 도구를 가지고 언어라는 모양과 의미라는, 분별의 도구인 언어를 가지고 이 법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달마 무심론 같은 데를 봐도요. 무심, 무심, 마음이 없다는 거거든요. 선에서 말하는 심, 마음은 불성, 자성, 본래면목을 얘기해요. 근데 달마 스님은 무심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무심, 마음은 없다 이랬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없다는 얘기냐,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무심, 마음은 없다 그 말이 마음을 서라는 거예요. 즉, 심과 무심은 다르지 않은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있다는 거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심을 얘기하고, 무심에게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심을 얘기한단 말이에요.

 

색에 사로잡혀서 물질적인 것에 소유욕과 집착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람에게는 공을 얘기하고, 또 공에 빠져가지고 전부다 세상 허무에 이렇게 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무슨 소리 하느냐. 여기 이렇게 활발하게 드러나 있는 이건 뭐냐, 색을 얘기한단 말이에요. 색 즉시 공도 얘기하고, 공 즉시 색도 얘기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색 즉시 공이라는 1단계, 쉽게 말해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색 즉시 공, 아, 색 불이 공, 공 불이 색. 색 즉시 공, 공 즉시 색이잖아요. 이걸 예를 들어 방편이에요. 1, 2, 3, 4단계라고 하면서 공부할 수가 있을 거예요. 주로 이런 단계로 우리 공부가 이렇게 나아가거든요.

 

근데 이 첫 번째 단계가 이제 오늘 제가 할 주제인데요. 이 첫 번째 단계가 뭐냐면, 색 불이 공이라고 했어요.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 즉, 이 말은 무슨 말을 우리에게 하고 싶은 거냐면, 우리는 담진치 삼독에 사로잡혀 있죠. 왜 그러냐면, 내가 실제 한다고 여기니까. 이 몸이 나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내 마음이야. 몸과 마음을 가진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잖아. 멀쩡히 존재하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돈도 벌고, 성공도 하고, 명예와 권력도 누리고,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이거를 모든 사람들은, 일반 대중들, 모든 중생들은 전부 다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고 있단 말이죠.

 

내가 당연히 있으니까, 나와 남이 둘로 나뉘잖아요. 그러면 남들보다 내가 더 많이 가져야 돼요. 남들로부터 내 것을 빼앗기면 안 되고요. 그래서 내 꺼, 내 것이다라는 아와 아소, 나와 내 것을 붙잡아서 쥐는, 취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 돼요. 우리가 사는 삶의 목표가 그거잖아요. 우리 삶의 목표 다 그거 아니에요? 내 거 늘리는 거. 나, 나가 좀 더 오래 살고, 내가 좀 더 건강하고, 내가 좀 더 잘나고, 그리고 내 거, 내 돈,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위, 내 명성, 내 거 늘려나가는 거, 그게 우리들의 삶의 목표잖아요.

 

그런 일반 중생들에게, 일반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첫 번째로, 첫 번째 방편으로, 쉬운 방편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게 바로 색 불이공입니다. 여러분, 이 색이라는 거, 오원이라는 거, 오원으로 이루어진 이 몸과 마음, 또 내가 내 꺼라고 취하고 있는 나와 내 꺼라는 거, 아와 아소, 그게 진짠 줄 알았죠? 진짜 자기고, 진짜 자기 거라고 생각하고 사셨죠? 아닙니다.

 

이 몸, 왔다 가는 겁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겁니다.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전부 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겁니다. 내 꺼, 영혼이 내 거인 게 있습니까?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죠.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이게 이 세상 전체가 본래 있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있다고 관념으로 취한 거예요, 관념으로. 이게 부처님만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요즘에 유발하랄이라고 해서, 사피엔스라는 책이 되게 유명했어요.

 

근데 그 분이 쓴 글에 보니까 되게 인상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뭐냐면, 인류 역사 속에서, 역사 중에 어떤 한 사람이 바보 같은 상상을 한 거예요. 약간 미친 상상을 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거예요. 어떤 상상을 했냐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땅에다 이렇게 금을 거 놓은 다음에, 널찍하게 금을 거 놓은 다음에, 이거 내 땅이야. 이거를 사람들에게 믿게 할 수 없을까? 그 대신 본인들도 돈 벌어가지고. 땅을 이렇게 그어가지고 그건 네 땅 인정해 줄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까? 이 기발한 생각을 한 거예요. 미친 생각이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죠. 땅이 먼저잖아요. 내가 먼저입니까? 내가 와서 왔다 갔는데, 내가 어떻게 땅을 소유할 수가 있겠어요? 근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사람들을 믿게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생각이 의외로 이 중생들이 어리석어서 먹히더라는 거죠.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가 그걸 믿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 상상을. 그 미친 생각을 진짜라고 믿고 있으면서, 그 생각 속에서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은행에 갖다 바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갖기 위해서 한다는 거죠.

 

땅만 그런 게 아니라 돈, 돈의 가치, 국가, 모든 우리 유형, 모형의 모든 것들은 사실은 상상이 빚어낸 거라는 거죠. 관념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게 집단적으로 그것을 믿어버리기 시작하면 그걸 믿는 사람이 정상이고, 거기에 의문을 표현하면 그 미친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 사람들이 와서 땅을 지배하고, 땅에다 금을 긋고, 내 땅이야라고 했을 때 원주민들이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죠. 어떻게 이 어머니 돼지를 내 건, 이 거라고 소유를 할 수 있는 그런 상상력 자체를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그런 미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이 현대인들이란 사람은? 정말, 정말 바보 아니야? 이렇게 느꼈던 거죠.

 

그런데 지금 그걸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미쳐가는 세계 속에서는, 다 분별하는 세계 속에서는 그게 옳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이는 거예요. 어디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속에 있는 것만 알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결국에는 아는 얘기를 하는 것을 통해서, 아는 얘기하는 건 방편이에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는 것은 알아듣기 쉽게 아는 얘기를 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없는,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는, 아는 거면 알려지는 대상이잖아요. 아는 거잖아요. 그런 아는 나와 아는 것이 둘로 쪼개져야지만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법은, 법은 법이라고 이름을 했을 뿐이지 법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법은 대상이 아니거든요. 둘이 아니거든요. 둘로 쪼개지는, 내가 법을 잡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법의 본질과 진리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법을 알아야지, 내가 법을 깨달아야지, 내가 법을 깨달아야지, 내가 법을 깨달아야지. 법을 취해야지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가장 큰 망상입니다. 우리는 법을 알 수도 없고, 심지어 내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깨달아요? 나 없음을 깨닫는 건데, 깨닫는 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중생이죠. 깨달았다 하는 그놈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뒤에 다시, 즉시 공, 즉시 색에 나온 이유도 또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색불이 공,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될까요? 이 색이 진짜인 줄 알았어요. 내 몸이 진짜인 줄 알았고, 내 것을 늘려나가는 삶. 이게 내 인생의 목표였어요. 나와 내 것을. 늘려나가는 삶이 인생의 목표였는데, 이제 색불이공이구나. 색은 공과 다르지 않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는 '색은 색이다', '물질은 물질이야', '나는 나야', '내 소유는 내 소유야' 이렇게 여기면서 세상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아, 몸도 내가 아니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내가 아니고 내 것도 내가 아니구나', '내 생각도 그게 내 생각이 아니구나', '내 고정관념 전부 다 내가 취한 것이었을 뿐이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과도하게 붙잡아 집착하는 일이 저절로 줄어들겠죠.

 

물론, 아직은 지금 이 단계에서는 완전히 깨닫지 못하다 보니까 단박에 모든 괴로움이 다 해결됐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게 실제라고 여길 때와 공부를 해서, 마음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고, 법문을 듣고 하는 걸 통해서 '아, 이 색이 공과 다르지 않은 거구나'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분별의 습관에만 갇혀있다 보니까, 분별해서 '이게 나다'라는 걸 너무 당연시하게 여기 왔는데, 전혀 다른 가능성, 말도 안 되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가능성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이게 내가 아니다'라는 가능성, 이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니에요?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 둘 중 하나예요. '내가 모르든지 부처님이 헛소리했든지' 그러면 나를 믿을 거냔 말이에요. 부처님께서 저렇게 깨달아서, 당신 스스로 저렇게 깨달았고 그 많은 제자들, 스님들이 또 그렇게 깨달았으니, 내가 한번 믿어보자. '부처님 말씀' 한번 믿어보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있다니까요.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이 충격적인 사실이 진실이라니까요.

 

이 우주가 고정된 실체로 딱 이 세계라는 우주가 정해져 있어서 내가 이 우주에 와서 살다가 죽어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고 법이라고 부르든, 이 내 마음 위에 삼남완상 우주가 펼쳐지는 거예요. 온 우주에는 70억 인구가 내 마음 위에 펼쳐지는 거라는 식의 방편의 표현도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측면이 있어요.

 

모든 설법은 전부 다 그렇습니다가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측면도 있겠다. 이렇게 해석해야 돼요. 이렇게 얘기하면 그건 줄 알고 저렇게 얘기하면 그건 줄 알고 해서 거기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살겠습니까? 인생을 사는데 과도하게 심각하지 않아요. 이 몸도 내 게 아닌데 내 거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겠어요? 또 내가 주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것뿐. 돈 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되고 안 되고는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인연에 달렸다. 법에 달렸다. 법신 부처님께 달려있다. 중중모진의 이 무한한 연기 우주 이 법계에 모든 걸 내맡기는 거예요.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나도 하나의 인이잖아요. 원인을 내 마음이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조차 안 하면 아예 가난해질 수 있겠죠.

 

우주와 마음

 

그럼 내가 예를 들어 마음속에서 부자가 돼야 되겠다. 즉, 색은 공과 다르지 않지만 색을 잘 활용해 쓸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공하지만 잘 활용해 쓸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무엇이든 하는 거예요. 무엇이든 하는 거예요. 마음 나면 그냥 하는 거예요.

 

집착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긴장 없이, 조절이 이완이 되죠. 돼도 상관없고, 안 돼도. 상관없으니까, 왜?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법에 달린 일이니까. 말하자면 인연 따라 될 건 되고, 인연 따라 안 될 건 안 되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팔자 운명은 아니에요. 팔자 운명이면 내가 할 게 없잖아요. 내가 열심히 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 색불이공은 팔자 운명 따라간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버리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요. 인연과 보라를 했잖아요.

 

내 마음을 내서 내가 부자가 돼야지, 자식을 잘 키워야지, 깨달아야지. 어떤 원인을 내가 마음을 딱 일으키지 않으면, 연이 와서 붙을 수가 없는 거예요. 수많은 보조적인 연들 이 나에게 협조를 하지 않는 거예요. 도움을 주지 않는 거죠. 그런데 내가 딱 인을 가지고 마음을 내면 이 또한 인연의 조화지만,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그걸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인연의 조화로서 내가 그 마음이 일어나니까. 인연 따라 자기 마음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잖아요. 내가 일으키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조건 따라 일어나요. 자식이 학교를 다니는데, 그냥 공부를 보니까 썩 잘해요. 그럼 어떤 인연이 일어나겠어요. 얘 학원이라도 좀 보내볼까? 예를 들어, 이런 마음이 일어나겠죠. 누가 나한테 해꼬지래요? 어? 내가 가만히 있으면 계속 욕먹겠는데? 한마디 해야 될까? 자연스럽게 일어나잖아요. 배가 고프면 자연스럽게 먹는 걸 찾잖아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조건따라 전자동으로 자연스럽게 법규가 이렇게 드러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내가 주도하려고 하는 내 인생을 뭔가 이렇게 깊이 개입해서 반드시 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우리가 반드시 돼야 된다거나, 반드시 되면 안 된다거나, 그런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무겁게 할 필요가 없죠. 자기를 괴롭힐 필요가 없죠. 반드시 '돼야 된다'는 거에 집착하면 인생이 괴로워지잖아요. 반드시 자식이 이 정도 대학은 가야 된다 하고 집착하고 있으면 인생이 괴로워지잖아요.

 

근데 나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 해. 그런데 그 결과는 나에게 달린 일도 아니고 너에게 달린 일도 아니야. 인연에 달린 일이야. 이렇게 여유가 생겨요 저절로 집착이 사라져요 방아착 한다 그래요. 집착이 탁 놓여요.

 

놓이는 어떤 이런 효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이렇게, 첫 번째 단계 색 불 이이공 아, 나는 색이 진짜 뭔가 실제 하는 줄 알았는데, 아 이게 공과 다르지 않구나. 이게 무하고 연기고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구나. 그 정도의 실체적 자아가 없구나. 그것만 내가 자각을 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삶이 가벼워지겠습니까. 전혀 다른 어떤 안목이죠.

 

이것만 해도 사실은 일반, 어떤 뭐랄까 이 세상에서는 놀라운 상상할 수 없는 철학이죠. 와 저런 철학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놀라운 철학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