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에 대한 정형구처럼, 정형구처럼 되어 있는 게 뭐냐면, 좀 간단히 추려서 말씀드려 보면,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하다,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게 변하고 괴로운 것들을 나다, 내 것이다,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물질과 공에 대한 대승불교적인 설명
또 느낌, 생각, 의지, 의식, 나머지 오원도 마저 전부. 다 똑같이 반복이 되고 있고요. 이와 같이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잘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생각, 의지,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나고, 욕망에서 벗어남을 통해 해탈을 얻는다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이것이 이제 우리가 산법인이라고 부르는 무상, 고, 무화에 대한 정형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앞에서 제가 연기법과 산법인을 아울로 설명을 한 것처럼 무화다라고 하는 얘기, 또 대승불교 경전에서 반야심경에서부터 공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 제가 방금 전에 읽어드렸던 이 부분, 무상, 고, 무화, 연기법에 대한 대승불교적인 설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 하면 보통 없다, 텅 비었다, 완전히 없다 이렇게 보통은 해석하기 쉬운데 만약에 그게 순수히 그냥 없다는 뜻이었으면 무와 유라는 언어로 써도, 무라는 말로 써도 충분히 쓸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공이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실제 하는 것 같이 여기는 모든 것들, 이 물질세계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 우리가 색, 불이 공하듯이 색, 색이라는 건 이 물질세계 내 몸을 비롯한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모든 물질세계를 말하죠.
이 세상 모든 삼남안상, 물질세계 모든 것들은 공과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이렇게 생겨진 우리 몸도 그렇고 이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이 화합하면 잠깐 생겨났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그거는 없단 말이죠. 제가 그 비유를 종종 듣는데 우리가 집 앞에 허리를 숙여서 땅을 이렇게 바라보지 않으면 내가 이 집에서 10년, 20년을 살았어도 집 문 앞에 꽃이 피고 있는지, 어떤 꽃이 피고 있는지, 어떤 벌레들이 기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보기 전에는, 내가 그것을 바라보기 전에는 그건 거기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지만 이 사람이 마음을 내서 보지 않고 살다가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문 앞에 있는 꽃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거란 말이죠. 인연이 내가 그것을 보겠다는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또 허리를 굽혀서 직접 바라보는 그 어떤 인연과 조건이 갖춰졌을 때 그것은 비로소 있는 것이지. 있지만 실제 한다고 볼 수 없단 말이죠.
원시시대 사람들이나 어디 한 마을에 갇혀가지고 세계가 어떤지 전혀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 이렇게 전쟁이 나고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거를 전혀 모를 수도 있겠죠.
즉, 인연 따라 이렇게 우리같이 이런 사회에 태어나서 배우고 이런다는 조건에 따라서 우리가 아 그런 것들이 있었구나 하고 이렇게 알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들은 조건이 화합해서 그렇게 있는 것이지, 그것이 실제 한다고 할 수가 없단 말이죠. 연기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생 인연멸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가짜로 화합하면 그것이 생겨났다가 그것이 다하면 인연이 다하면 그거는 그냥 사라질 뿐이죠. 제가 이렇게 꽝꽝하고 꽁꽁하고 소리를 내는 것과 똑같다 그랬죠. 조건을 인연생 화합시켜 주면 이 조건에 따라서 소리가 생겼다가 또 조건이 다 끝나니까 소리가 사라졌잖아요. 이처럼 이 소리는 공한 거란 말이죠.
이 물질도 다 몸도 다 공한 거란 말이죠. 왜 공하냐,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과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사라지니까. 저 말씀을 몇 번 드렸죠. 여기에서 공기를 싹 빼버리면 지금 나는 살아 있느냐? 그래도 살아 있느냐? 내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느냐? 공기라는 조건만 그 하나의 조건만 싹 빼더라도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고 할 수 없단 말이죠.
그렇게 나는 내가 잘 나서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고 내가 이렇게 나는 부자고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것이 아니라 인연이 조건이 하나만 빠져도 거긴 내가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인연생, 인연멸하는 것을 연기법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실제 하는 것이 아니다. 무하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보통 진짜 내가 있으려면 상일성과 주제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말을 쓰거든요. 상일성은 항상 해야 된다는 거죠. 나라면 내가 이게 나야 이러면 이 몸이 나야, 이러면 이 몸이 항상 해야 되잖아요. 20년 전 몸이 상일성 항상 한다면 지금도 그 몸이었어야죠. 그런데 그 몸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미 다 사라졌고 지금 이 몸은 전혀 새로운 몸이 연기적으로 화합되어서 이 몸을 이루고 있잖아요. 20년 전에 있던 그 몸은 어디 간지 사라졌고 지금 여기 전혀 다른 몸이 와있단 말이죠. 화합되어 있단 말이죠.
이처럼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상일성이 없기 때문에 이 몸을 가지고 오원을 가지고 나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주제성이라는 건 뭐냐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이렇게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아니 스님 당연히 나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데요. 저는 내 마음대로 사는데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있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것도 있죠. 그런데 우리는 살아온 삶의 경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되던 것들만 하고 사는 거예요.
진실을 탐구하는 방법
왜? 안 되는 건 안 되는 줄 아니까. 손을 이렇게 접을 수 있어요? 내 마음대로 돼요. 나는 손을 접을 수 있는데요? 뒤로 접어보세요. 뒤로는 안 접힌단 말이에요. 이렇게는 주먹을 질 수 있지만, 뒤로는 주먹이 안 접혀진다고 말이에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단 말이죠.
내 마음대로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 나는 열심히 내가 노력해서 부자가 됐는데요? 그런 사람이 더 많은가요? 아니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난 부자가 안 됐는데요 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안 되는 사람이 더 많죠.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는 사람이 잘 없을 거예요. 원하는 만큼 가진 사람도 없을 것이고. 즉,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자기의 생각이에요.
자기의 아상. 내가 진짜 있을 거라는 환상. 그 생각이 만들어낸 착각. 그게 주제성이라고 해서 내가 내 인생을 주제하지. 내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거지. 이런 착각에 빠져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거 주제 할 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떤 사람이 나는 손을 뒤로 주먹을 접을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 거야. 그런 사람이 있다고 쳤을 때 바보 아니에요? 왜? 쓸데없이, 왜 이걸 뒤로 주먹을 져요? 이렇게 앞으로 되는 것만 하면 되는데. 이걸 왜 하려고 하겠어요? 내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니까. 나에게 달린 일이라고 착각하니까. 주제성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게 난 뒤로 주먹질 거야. 이게 말도 안 되는 말인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바로 나는 얼마를 벌 거야.
내 자식은 어느 대학교를 보낼 거야. 이번에 반드시 진급을 할 거야. 나는 대통령이 될 거야, 정치인이 될 거야, 나름대로 원하는 거 있잖아요. 그거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일이지. 그래서 결국에는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연기에 달린 일이에요. 인연에 달린 일이에요. 그러니까 인연에 달렸다는 건 나한테 전혀 안 달렸다는 건 아니죠. 나 또한 하나의 인연이니까, 내 마음 쓰는 것도 하나의 인연이니까. 그러니까 나에게만 달린 일은 아닌 거죠. 연기에 달린 일인 거죠.
그런데 이념법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1년 뒤 어떻게 될지, 10년 뒤 어떻게 될지, 내 인생이 성공적일지,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걸 이룰지, 이루지 못할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을 거라고 오만하게 착각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돼요. 그게 무화를 인정하는 거예요. 아, 이게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삶을 내가 사는 게 아니구나. 내가 사는 이 육체를, 육신을, 온을 지배해서 온이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도록 이렇게 온 격 조정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적인 자아가 별도로 있어서 그 자아가 이걸 조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뭐, 로봇입니까? 뒤에서 무선 조정을 하게. 그런 자아가 별도로 있지 않다. 그게 무화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어, 스님, 스님 본문을 들어보면 또 선사 스님들의 선의 본문을 들어보면 그게 뭔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던데? 그리고 그게 바로 불성이고 주인공 아닙니까? 심지어 선사 스님들은 비유를 그렇게 들기도 하거든요. 인형극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비유를 들어요. 인형극을 할 때 위에서 사람이 인형을 이렇게 조정하면서 말을 한단 말이에요.
어린이들은 위에서 사람이 조정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모르고 어린이들은 그 인형이 진짜 살아 움직이는지를 착각하는 거죠. 이것과 비슷하다고 선사 스님들도 본문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비유를 들어보면 명백하게 석가문의 부처님의 무화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게 따지면 불교의 모든 말은 모든 언어는 전부 다 어긋납니다. 딱 떨어지는 말, 이 법을 딱 떨어지는 말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공이란 공사상을 딱 떨어지는 말로 규정할 수 있으면 제가 뭐하러 이렇게 오래오래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면서 이렇게 하겠어요. 이게 공식이 있었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냥 공식 딱 설명해 주고 공식을 딱 외우라고 하고 설명해 주면 끝나잖아요. 공식을 설명해 주면 결코 안 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불교 공부예요. 그런 공식은 없다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법을 설하셨지만 나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라고 했다는 말씀을 다 들어보셨을 거예요. 부처님이 그렇게 많이 설하셨는데 나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그러셨어요. 부처님께서 설하신 거라고 생각해서 그걸 쥐고 붙잡아서 머물러서 이게 법이야라고 딱 쥐고 있는다면 그 사람은 외도입니다. 외도. 공사상을 쥐고 있는 사람은 진짜 공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색, 불이 공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색은 공이라는 소리잖아요. 아, 물질, 우주 이거 전부 다 공이구나. 이렇게 똬리를 틀고 머물러서 집착해서 아, 이거 전부 다 공 이래. 의미 없어, 이거. 인생 사는 거 의미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중도적인 방식으로 색, 불, 이, 공 다음에 다시 공, 불, 이, 색을 설하신 거예요. 색도 아니다. 그런데 공도 아니다 이 소리거든요. 색에 딱 머물러서 무휴정법이라고 하잖아요. 금강경에서 머물러서 정해져 있는 법은 없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결론을 내려주세요. 공입니까? 색입니까? 이거 답을 내고자 한단 말이에요. 뭐가? 분별심은. 분별심은 공이면 공, 색이면 색 명확한 걸 좋아해요. 그런데 이 공부는 무분별지를 깨닫는 것이고 무분별심이라고 그러잖아요.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는 것은 분별심 아르마리밖에 되지 못해요. 그래서 이 공부는 아르마리로는 한 발도 뗄 수 없고 아르마리로는 거꾸로 가게 됩니다. 공부가 거꾸로 가게 돼요.
불교는 이게 참 신기해서 많은 스님들이나 많은 교수님들이 여러분이 색부리공, 공부리색, 색책시공, 공직시색, 하다못해 연기법, 공사상, 모든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 정형화된 교과서 같은 게 없어요. 물론 그런 노력을 조금씩은 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정형화된 불교 교과서, 그것만 외우면 끝 이런 거 있습니까? 그게 정해져 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정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이게 놀라운 장점이자 어찌 보면 우리는 단점이라고 여기기도 하는데 많은 불자분들은 헷갈려요. 공부하기가 어렵다 그래요. 왜 똑같은 교리를 이 스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절 스님은 저렇게 설명하느냐. 타 종교는 아니면 다른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런 것들은 딱 정확하게 똑떨어지게 얘기를 하는데, 도대체 불교는 스님들마다 절마다 어떻게 수행해라는 얘기가 절 100개면 다 달라요.
스님들의 다양한 해석
어디선 연불해라. 어디선 독경해라. 어디선 진원 해라. 연불도 아미타불이 최고다. 관생보살 해라. 지장보살 해라. 진원도 얼마나 많습니까? 진원집이 있을 정도로 상황상 황마다 진원을 달리 해라. 아니면 오로지 운반의 반면만 해라.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 좌선방법도 다르고요. 명상방법도 다르고요. 오만가지 다른 방법들이 있어요. 그게 전부 다 방편이라서 그렇습니다. 전부 다 방편이라서 그래요. 팔만대장경이 전부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강을 건너는 땜목이라고 하는 말 들어보셨을 거예요.
방편이라는 거죠. 강을 건넜으면 땜목을 버려야 되듯이 반야심경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반야심경을 버려야 됩니다. 그 말은 뭐겠어요? 공이라는 말, 색이라는 말, 온이라는 말, 무아라는 말. 이게 전부 다 말이에요. 말. 여기 붙잡아서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단 말이죠. 이렇게 나라고 여기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 나와 세계는 우리는 뭔가 이렇게 정해져서 딱 실체적인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좀 전에 하던 얘기 마저 하죠. 선불교에서는 내가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 진짜 자기가 있다고 얘기하지 않느냐. 이게 바로 말의 오점입니다. 말로써 설명한 모든 것은 진짜 진실이 될 수 없어. 실상 반야가 될 수 없습니다. 말로 설명된 모든 것은 기껏해야 전부 다 방편 반야에 불과합니다. 방편의 말에 불과하단 말이죠.
선에서 말하는 주인공, 벌레면목, 참나, 불성, 자성하는 것. 그게 어떤 인격적인 신 같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라고 배웠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아니면 이게 어떤 연기법 같은 어떤 법, 어떤 원리 이런 거라고 배웠나요? 아니면 여기 내 안에서 나를 어떻게 주제하고 움직이는 뭔가가 따로 있는 거라고 배웠습니까?
반야심경에서 색, 불, 이, 공, 공, 불, 이, 색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서 색 즉시 공, 공 즉시 색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방편에서는 이 앞에 거 두 구절은 방편이 좀 많이 섞인 방편이에요. 오염이 심한 방편이에요. 주위의 방편은 그나마 방편을 좀 적게 쓰려고 노력한 방편이에요. 색 즉시 공이라고 했잖아요. 색이 드러나 있는, 우리가 색을 가지고 이렇게 큰 스님들이 도가 무엇입니까? 하면 이렇게 작용을 드러내 보인단 말이에요. 이렇게 움직여 보인단 말이에요.
이게 뜰 앞에 잔나무가 있으면, 뜰 앞에 잔나무다. 도가 무엇입니까? 컵이다. 이렇게 얘기해요. 도를 물었는데 컵을 말하죠. 이게 뭐냐면 색 즉시 공 여기는 색이, 우리 눈에는 색만 보여요. 그런데 선사 스님들은 여기에 공을 얘기하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는 색이 있지만 공이 즉해서 있단 말이에요. 즉해서 같이. 그런데 우리가 오랜 분별의 습관 때문에 이걸 보자마자 분별하고 보자마자 이름 붙이고 명과 상, 명과 생으로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매칭해서 알아차리는 그런 분별심이 자동반사적으로 작동하다 보니까 여기에서 늘 드러나 있는 법을 보지 못하고 색만 보는 거예요.
이처럼 다시 돌아와서요.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주인공이 이 방편으로는 그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그런데 그런 쉬운 방편일수록 머리에서 그림이 싹 그려지는 방편일수록 안 좋은 방편이에요. 저도 가끔 쓰는 말이, 큰 스님들이 옛날에 이런 말씀 쓰시죠? 이 송장 끌고 다니는 그놈! 이런단 말이에요. 아주 안 좋은 방편이에요. 사실은 그럼 그 큰 스님께서 이게 안 좋은 방편이라는 걸 모르고 쓰셨겠어요? 알고 쓴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선에서 말하는 참나라는 게 따로 있는 참나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있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 있느냐, 없다라고 얘기할 수 없어요. 그게 중도의 유무 중도라 그래요. 항상 법은 중도로 드러내야 돼요. 있다, 불성이 있어. 이렇게 얘기하면 반쪽짜리 법문이에요. 불성 없어. 이것도 반쪽짜리 법문이에요.
불교는 참뜻은 무하야. 무하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거예요. 불교의 참뜻은 진하야, 참나야. 이것도 집착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님들은 왜 무하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느냐? 방편으로. 무하라고 말하지만 무하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진하라고 참나라고 하지만 참나라고 따로 내세우지 않아요. 그래서 그러다 보니까 이제 다양한 방편들을 자꾸 쓰다 보니까 그렇게 말해놓고는 주인공을 찾아라 이렇게 말해놓고 사람들이 주인공이 뭔가 따로 있나 보다, 뭔가 그 어떤 실체가 따로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게 없다는 얘기를 해주기 위해서 공하다 이렇게 설명한단 말이에요. 또 공적영지 이렇게도 표현해요. 진공묘유 이렇게 표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