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올바른 직업생활과 바른 삶 2편

부처님은 끊임없이 법을 하셔서 법문을 하시고 설법을 하시고 법을 가르치고 이걸 통해서 삶을 하신 거죠. 이게 정가을 하신 거죠 부처님께서 이렇게 딱 대놓고 설 하셨단 말이에요. 축문을 써서 사된 생활이라고 표현을 하셨단 말이죠 그니까 사된 그깐 정명이 아니라는 거죠 삿된 직업 생활이라는 거죠 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출가자와 수행자

그래서 이걸 다르게 말하면 요즘 말로 하면 뭐 부적 써 주고 사주 관상 봐주고 궁합 봐주고 뭐 점쳐 주고 이거를 하면은 그건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자의 정명이 아니다 이렇게 했단 말이죠. 이것은 부처님께서 그냥 탁 대놓고 말한 거예요.

 

적어도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된 정이 된 정명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했 말이죠 그래서 된 생이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했고 또한 어 정이란 바른 출가 정이란 그 보통 부처님 당시 경전 계율에 음 아함경 네가 같은 초기 경전에 보면 일반 신도님들이 스님들에게 이제 보시하는 물품들을 이렇게 항상 네 가지가 나와요.

 

네 가지가 뭐냐면을 공하는 거 그 음식을 리 구를 공하는 거 그리고 탕약 몸에 병이 나거나 했을 때 약을 공하는 거네 가지를 이제 가자에 공해야 할 대표적인 물품으로 이렇게 꼽고 있거든요 그런데 경에서는 출가자의 바른 정이란 의복과 음식과 침구와 탕약을 구할 때에게 구하고 에지는 않는 것 이것을 이제 또 명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말하는 의복 음식 침구 약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어 스님들에게 후원받는 이제 그런 것들을 야기할 거예요 그런 것들이 법에 맞아야 된다는 거죠 법에 맞지 않는 것들은 어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죠 어 이제 이런 점들을 이제 출가자의 정명이 했고요 또 이제 재가자의 정명도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을 볼 때는 계율 마찬가지죠 부처님께서 이건 하지 마라 이건 하라 이렇게 방편으로 설하요법 있것은 부처님이 불교에 유일하게 있는 게 개차법이란 말이에요. 계율을 지켜라 하고 이렇게 설명해 줘 놓고 이거를 지킬 줄도 알아야 되는데 범할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죠. 열고 닫을 줄 알아야 한다 범할 줄도 알고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당이 말은 뭐냐면 그 계율 절대성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래요.

 

부처님의 그 그 친절함 거기에서 자상하게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을 뿐이지 그거를 어떤 어떤 절대 시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반하시게 직전에 스님들을 모아놓고 이제 이런저런 소소한 계율은 아마 버려도 좋다 혹은 그때그때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이렇게 좀 자연스럽게 이제 변해도 좋다.

 

근데 이제 그 이후에 뭐 율사 스님들이나 그 어른 스님들께서 장로 스님들께서 부처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우리가 너무 섣부르게 어느 게 도대체 버려야 될 개울이고 어떤 게 버리면 안 될 겨울인지 우리가 판단하는 건 쉽지 않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 가서 자칫 스님들이 너무 막 막행막식 하면서 개울도 지키지 않고 사는 그런 게 있을 수 있으니 그냥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그냥 다 지키자 이래 가지고 이제 지금까지 개울이 온 거죠.

 

근데 부처님의 본뜻은 그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2500년이나 지났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믿어 믿고 따르면 안 되겠죠 당연히 그것은 법을 상으로 박제화 키는 거거든 법 상이 된단 말이죠 사회가 달라지면 계율로 달라지는게 당연한 거예요 왜냐면 불교는 정해진 고정 실체적인 진리라고 할만한 법을 내세우는 게 없단 말이에요.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어요 법이라는 것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라는 걸 깨닫는 게 법이에요 그 무주이라고 하잖아요 어디에도 머무를 것이 없다는 것은 이건 법이야 해서 거기에 딱 머물러 버리면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내가 머무르게 되면 그래서 무유정법 정해진 바 법이라는 걸 딱 울 수 없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좀 이제 현대에 맞게 조금은 좀 변화시킬 수도 있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가 개울이나 어떤 윤리 도덕적인 가치를 그때그때마다 계속해서 제정해야 될 것이냐 그러면 제정할 때마다 지키는 사람은 이건 지켜야 되고 저건 어겨도 되고 이런 것들을 내 삶이 부자연스러워요 을이라는 절대성을 지닌 어떤 것에 나를 추에 끊임없이 맞추며 살아야 되잖아요.

 

계율과 관용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고 자유스럽지 못한 일이겠어요 어 이제 이런 말을 하거든요 스님들께서 출가를 하실 때 보통 이제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요 처음에 한 5년 정도는 이제 이제 비구 비구니계를 받을 때까지는 어 은사 스님을 시공하면서 은사 스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서 아주 뭐 그야말로 부처님처럼 이렇게 모시면서 이렇게 살아요.

 

그러다가 미국의 비구니계를 받고 나면 이제 훌훌 떠난단 말이에요 그러 이제 은사 스님들도 그걸 어떻게 못해요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이죠 그러면서 안 떠나고 있는 스님들 그래서 옆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는 스님들이 가끔 계요 옛날엔 많았는데 요즘엔 잘 없대요 가끔 있대요.

 

그래서 그런 스님들을 보고 이제 상자라고 하면서 아주 행복해 하시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 스님들이 스님들이 떠는 을 크게 탓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이 떠나가는 스님들은 어떤 마음이면 이제 약간 눈총을 받기도 하죠 자신을 그렇게 공부시켜 주고 키워줬으면 좀 시봉 좀 하다 가야지 저렇게 자기 공부하겠다고 떠나면 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까음 좀 그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분들이 하는 말들이 이런 말이에요.

 

정말 자신이 안목을 밝히고 그러고 나면 영원히 거기에 이렇게 묶이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하는게 아닐 거 아니겠어요 그 임시로 묶여 있지만 나중에 결국에는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지는 자신이 법에 안목을 갖추게 됐을 때는 아까 말한 것처럼 계율이 나를 따라오 있어 여기서 말하는 이런 그 정명도 마찬가지예요.

 

부처님은 임시로 계율을 정했이 임시로 가자의 정명을 설명어 안 따라 야에 보면 무기를 사고파는 것 또 술이나 고기나 국물 같은 것들을 사고파는 것 그건 재가자의 정명이 아니다 이랬단 말이죠 그 당시의 시대를 보면 그 당시의 시대를 보면 어 자신이 직접 무기를 사고팔거나 또는 술이나 뭐 고기나 고기를 사고팔 자신이 고기 장사를 하려면 내가 잡아가지고 죽여서 팔아야 됐을 거 아니겠어요.

 

불교에서는 그러죠 삼정육이라고 해서 고기를 부처님께서는 고기를 먹지 마라고 하진 않으셨죠 어 직접적으로 내가 죽여서 먹는 고기 또 나를 위해서 죽여서 먹는 고기 또 나를 위해 죽였다고 의심되는 고기 이것을 삼정 6이라고 하 그거는 먹지 마라 그건 깨끗한 고기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고기를 안 드신 건 아니죠.

 

왜냐면 탁발을 하는 기본 원칙은 주는 대로 먹는 거였어요 분별 없이 왜냐면 뭐 카레 같은 것들이 다양한 게 막 들어가게 고기도 들어가고 뭐 오신 채도 들어가할 거 아니에요 본인들이 먹던 거 주지 신도님들이 추가 자들 왔는데 공양을 하는데 스님들을 위해서 따로 요리해서 주겠어요 먹다 남은 거 주는 게 원래 원칙이었다 보니까 그렇게 주니까 그 그런 것들이 따로 없었단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삼정에 대해서는 뭐 먹어도 뭐 된다 내지는 뭐 크게 그러지 않았단 말이죠 그니까 그 삼정은 먹었으 안 된다고 한 유는 뭐겠어요 인연을 몇 개 인연을 거쳐서 도매상 소매상 죽인 사람에서부터 이제 몇 인연을 거쳐 가지고 오게 되면 그 이제 그 뭐랄까 우리가 말 과보 살생의 과보 그런 것들이 이제 희석이 된다 뭐 이렇게 아마 이해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나를 위해 잡거나 이런 건 직접적으로 내가 먹고 싶어서 죽여서 먹게 되니까 그거는 좀 하지 마라라는 어떤 그런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어 그러다 보니까 그런데 지금 같으면 지금 이거를 액면 그대로 이거를 지킬 수는 아마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만약에 이걸 정말 어 윤리 도덕이라고 이걸 선이라고 해서 우리가 딱 정해 버리면 여러분 술 팔고 고기 파는 사람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식당을 하는 사람 중에 술과 고기를 안 파는 식당이 있을까요 그러면 술과 식당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죄의식을 가지고 식당 운영을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 그거를 유도하는 게 불교의 어떤 가르침이 아니겠죠 그러니까 아마도 이제 특히나 오늘날의 식당 같으면 그렇게 직접 잡거나 이런 게 아니라 도매상 소매상 거쳐서 뭐 뭐 미국 캐나다 소가 몇 달을 거쳐 가지고 뭐 이렇게 와서 여서 먹게 되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부처님 아마 말씀에 의한다면 그거는 그 삼정육 거기에 이제 먹지 말라고 했던 거에 속하진 않는 거일 수 있겠죠 아마도 그런 차원에서도 그럴 것 같고 해서 이것을 어 직접적으로 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거기 직접 어떤 그런 역할을 하지는 말라 이렇게 하면 우리가 좀 이해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요 또 맞지만 이과에서는 이렇게 말을 해요.

 

사기 치는 거 남들 사기 쳐 가지고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하는 거 또 남들 배신하는 거 이런 것들이 재가자의 명에 어긋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단 말이죠 어 이렇게 보면은 이렇게 하나하나를 가지고 우리가 부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아마도 그 당시에 20000년 전에 있는 많은 사람 어 다양한 근기가 있을 거 아니에요.

 

법과 이상

그러니까 이제 바른 정명을 탁 설해 주면 이거를 현실로 구체화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요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하나하나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을 거예요 근데 핵심이 뭐겠냐 이게 중요하죠 이제 바른 직업이라고 했을 때 그 바르다는게 뭐냐 그 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제 중도적인 목 기법적인 목 중도에 입각한 어 무아 고정된 실체적 자가 없다는 또 무자성 또 이런 어떤 그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어떤 삶을 영의 해 한다 이런 얘기죠.

 

다시 말하면 세상이 나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라는 연기적인 자각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직장 생활하는 데 있어서 내가 식당을 해요 식당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식당 운영해야 된다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죠.

 

연기법 지혜가 있다면 나와 너가 둘이 아니다는 너와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있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는 어떤 깨달음이 있다면 식당에서 안 좋은 음식을 쓰고 오래된 음식을 쓰고 내가 먹기 좀 찝찝한 음식을 쓰고 남들이 먹다 남은 걸 막 안 본다고 재활용해서 쓴다든지 예를 들어 이런 일을 느 말이에요.

 

내가 먹을 땐 그걸 안 한다면 남들이 먹을 때도 그걸 당연히 안 하겠죠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라는 연기법 자각이 있다면 지혜의 바탕이 있다면 저절로 정명이 일어난단 말이죠 저절로 어떻게 내가 내 직업을 운영할 것인지가 드러나는 거죠 식당 오는 사람들을 내 몸 건강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먹도록 할 것이고 또 회사에서는 물품을 만들 때 이것을 쓰는 사람을 생각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들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겠죠.

 

결국에는 우리에게 안좋은 의식으로 돌아오더라 내가 하청업체를 막 싸게 맡겨 버리니까 하청업체는 자기네들도 먹고살아야 되니까 죽을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위에서 기니까 소비자들한테 뜯어버리는 거죠 저 형편없는 음식을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에 소비자들이 그걸 알고 그럼 결국에 대기업이 욕먹는 일이 벌어지는 연기적인 일이 벌어지더라 거죠.

 

그래서 지금 윤리 같은 데서 어 정말 깨어 있는 기업은 어떤 기업이냐 이렇게 토론할 때 그런 얘기를 한다 그래요 옛날과 완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거죠 대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하청 업체를 살려 줘야 하고 또 소비자들을 진정으로 도와야 한다 옛날에는 어떻게 눈속임을 해서라도 우리가 부자가 되면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건 진정한 지혜가 아니더라는 거를 깨닫고 있어요.

 

실제로 그래서 지금이 상의 상관적인 연기법 자각이 기업 윤리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답니다 요즘에 그게 이렇게 서로 연결된 연기법 지혜가 있다면 저절로 그런 그게 바로 정명이 있죠 바른 어떤 직업윤리 이런 것이겠죠.

 

또한 그 세상이 다 연결돼 있다라는 것 연결돼 있음으로써 나라는 고정된 자아가 있는 게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지 거기 고정된 실체적인 자가 없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