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올바른 직업생활과 바른 삶 1편

중도의 수행이 뭐 염불 독경 좌선 뭐 사경 뭐 이런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렇게 얘기를 하셨단 말이죠. 좀 쉽게 말하면 어 바른 정견이라는 바른 목 바른 견해 바른 목을 상태에서 어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거 그게 수행이란 말이죠 그니까 수행은 평상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말할지 어떻게 생각할지 또 어떻게 행동할지 대한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제 어떤 삶을 살 것이냐 그걸 수행이라고 하신 거예요.

 

중도의 수행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수행은 어디 저 절에 가서 고요한 절에 가서 조용히 혼자 고요에 앉아서 우리 알았냐 그러죠 고요한 곳에 가서 수행하기 좋은 곳에 가서 염불을 오래도록 하고 참선으로 오래 하고 앉아 있고 그걸 수행이라고 하신 게 아닌 거죠 삶 속에서 자기가 늘 매 순간순간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건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살 것인지 심지어 이제 오늘 공부해야 될 부분이 이제 정명인요 바른 직업 생활 또 바른 삶을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어떤 직업 생활을 어떤 마음 가지고 할 것이냐 그래서 삿된 직업 생활이 아니라 바른 직업 생활을 하는 것 그게 수행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은 절에만 있는게 아닌 거죠 염불하고 독경을 때만 있는 게 아니라 직장 생활하는 속에서 정명이 있단 말이 말에요.

 

그리고 늘상 가족들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매 순간순간에 이게 전부 수행이라는 얘기죠. 삶 전체가 그냥 통으로 수행이라는 수행이 돼야 된다 얘기죠. 근데 그렇게 수행이 되려면 억지로 삶을 수행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른 안목을 갖추면 앞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연기법과 사성제와 어 또 중도 공사상 뭐 이런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안목을 확보하게 된다면 그 바른 안목 바른 지혜의 안목 거기에 따라서 저절로 삶이 변화된다는 거죠.

 

억지로 말을 바꾸고 그렇다고 해서 팔 정도가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바꾼다고 하니까 바르게 말하려고 막 길을 쓰고 애쓰고 바르게 생각하려고 막 길을 쓰고 애쓰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저절로 바른 안목이 갖춰지면 세상을 보는 지혜의 안목이

갖추어지면 저절로 저절로 바른 바른말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이 뒤따르는 거예요 심지어 말을 좀 거칠게 했다 할지라도 인연 따라 상황 따라 거칠게 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밖에서 봤을 때는 어 저 사람 말을 거칠 있는데 그것이 바른 말 적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어요.

 

바른 안목이 갖춰져 있는 상태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정가 됩니다 심지어 이제 그런 얘기가 있죠. 처음 스님들이 출가할 때는 계율을 따라가야 되고 계율을 열심히 지키면서 따라가야 되는데 나중에 이제 큰 스님들이 이제 공부를 많이 하시고 안목을 갖추고 밝히신 분들은 보면 내가 계율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율이 나를 따라온다 막막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삶을 더라도 자유롭게 걸림 없이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우리가 계율 어겼다고 얘기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원요 스님을 원요 스님이 막 시골 장터에 가서 표주박을 두드리고 무예가 부르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개울에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나오거든요. 그런 걸 가지고 우리가 계율을 어겼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단 말이죠. 뭐 또 근세 선지 식이었던 뭐 춘성 스님의 책을 이렇게 언 봤더니 당신도 막 그냥 입도 거친 말을 막 해 가면서 육도 문자를 해 가시면서 또 그 그 시장에 가서 시장에는 그냥 할머니 어르신들 하고 같이 어울려 지내면서 그렇게 교화를 하셨더라고요.

 

그런 걸 보고 우리가 계율을 어겼다 그나 우리 바른 팔정도를 지키지 못했다고 얘기하지 않죠. 그래서 이렇게 어 바른 안목을 갖추게 되면 법에 대한 바른 안목이 생겨나면 이런 팔정도를 보고서 야 불교를 실천하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하구나 말하는 거 하나 내가 항상 염두에 두면서 바른말을 해야 되고 이렇게 억지스럽게 유의 조작으로서 억지스럽게 그걸 막 만들어 내야 된단 말이 아니에요.

 

바른 안목

그냥 사실은 우리 정견이 나머지 전체를 정경만 실천하게 된다면 나머지가 전부 다 저절로 실천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바른 안무만 갖추면 그다음에는 저절로 따라 온단 말이야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말 바른 직업 생활 모든 것들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앞에 이제 공부했던 것처럼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그 행동 이것이 이제 정사 정어 정업이었거든요 근데 이 세 가지를 제 바탕으로 정견을 바탕으로 바른 신구의 삼업을 청정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제 오늘 공부할 부분이 정명 있니다 정명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 정도라는 수행 부처님의 수행법 속에 바른 직업이 있다는 게 놀랍죠.

 

우리는 직장 생활하는 걸 수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그 일반 재가자 분들이 그냥 직업 생활하는 것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일을 하는 것이 전체가 어이 수행을 얘기했다 말이죠 부처님께서는 따로 떨어져 있는 동 떨어져 있는 어 그냥 절에서만 하는 그런 수행을 얘기한게 아니구나 그러면 정명이 뭐냐 이제 바른 직업이거나 바른 직업이 바른 생계 아고 보면 꼭 남편 거사님들이 나가서 직장 생활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보살님들이 생계 의주를 위해서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정명이 말이죠.

 

즉 삶 전체를 이제 지압해 놓은 것이 증명입니다 그래서 어 바른 말 생각 행동을 바탕으로 삶을 생계를 자기 살림 사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어이 불교에서는 어이 마음공부를 자기 살림살이 공부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거든요. 이 정명이게 이제 바른 생계 이게 바른 살림살이 이런 얘기거든요 그 이거 이제 또 따와 가지고 어 마음 살림살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살림살이 가제 도구가 없으면 살림을 살 수 없듯이 자기의 마음 살림살이가 진짜 살림 살이란 말이죠. 이제 여기 정 명예는 이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은 어 상당히 친절하세요 그리고 상당히 자상하지 선불교 같은 한국은 선불교가 많이 들어와 있잖아요.

 

선불교와 법의 차이

 

선불교에서 상과는 거리가 멀죠 이게 법이다 이러고 끝난단 말이에요 한번 땅 때리고 이게 법이다 하고 알겠느냐 모르겠다 하면 안 돼 치고 소리 뻑뻑 찌르고 이제 이런 게 이제 선 불교다 어 자칫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만이 불교의 전부인 건 아니죠.

 

그것은 그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어 그런 공부인 어느 정도 이제 근기가 되어 있는 그런 공부인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주 직접적인 그 공부 한번 탁 깨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이 낙동 을 탁 주는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 그런 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 시론 개론 생천 뭐 재욕의 과한 어 춘리의 공덕 성제는 이렇게 단계별 설법을 하셨거든요 즉 낮은 근기에 있는 일체 모든 중생들 그 당시로 말하면 불가촉 천민에서 모든 근기에 사람들을 아우르는 법을 하셨고 이 법의 본질만 이렇게 탁 설해 놓으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까 그것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풀어서 설명을 많이 하세요.

 

부처님의 초기불교를 부처님의 삶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면서 어 선사 스님들과 전혀 이를 달리하는듯한 정말 그 낮은 곳에서 눈높이를 같이 맞추면서 온갖 다양한 기의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자상하고 친절한 법을 사라졌더라고요 그래서 어이 우리는 우리 지금 현대인들은 2500년 전에 석가머니 부처님의 삶도 지켜보고 또 한 천년 전에 선사 스님들의 삶도 지켜보고 또 그 사이에 말 그대로 공황기 깨달음이 없던 이런 시대도 어 우리는 글로 서지만 다 돌아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두루두루 아우르는 어떤 그 지혜를 수확할 수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어 지금의 불교는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 친절 자상한 방편의 가르침과 또 선불교의 어 어떤 단박에 깨주고 단박에 가리켜 보이는 그런 직지의 가르침이 잘 좋아가 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됐습니다.

 

이 정명을 설하는데 있어서 부처님께서 이제 어떻게 자상하게 설을 하셨냐면 출가자들이 위한 정명과 그 재가자들의 위한 정명을 이렇게 나누어서 설명을 하는데 이게 좀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이제 출가자를 위한 증명을 설명하실 때는 중화 한경에 어 스님들이 생활하는 게 조금 경제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신도님들 테 축문을 써서 이게 충문이라는 건 막 이게 부적 써 주고 뭐 이렇게 뭐 이렇게 충문 말 그대로 축원하는 글 같은 거 써 주고 이런 걸 써서 삿된 생활을 존속하지 마라 이걸 출가자 정령이라고 한다 그랬단 말이에요.

 

또한 맞지만 이까야는 점을 치며 살아가지 마라 이렇게 얘기 했거든요 이게 스님들의 정이란 말이에요 스님들도 어찌 보면 어떤 바른생활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그 생활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은 법을 전하셨고 평생 사시면서 부처님께서 막 신도님들이 이렇게 오시면 낮에는 스님들을 위해 법을 사라고 오후 나절에는 동네 신도님들이 이렇게 오시면 신도님들을 위해서 법을 하셨다 그래요.

 

근데 근데 그 장면을 보면 신도님들이 이렇게 모이면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질문 있으면 질문 듣고 또 부처님께서 하실 법문 있으시면 법문을 설하시고 이렇게 하시는 일상을 평생을 사셨거나 이제 신도님들 다 뭐였냐 하고 나와 가지고 막 목탁 치면서 염불하고 도경하 뭐 기도하고 뭐 뭐 이렇게 뭐 이런 걸 안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편이 생겨 났으니까 그또한 어 나름대로의 어떤 그 근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방편이 돼요. 그걸 무조건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사신 삶의 방식 그것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한번 눈여겨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