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느낌과 감정이 진짜냐, 우리가 사실 정서적인, 감정적인 상처에 평생 휘둘리면서 사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데 느낌과 감정이 진짜냐, 그것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구나라는 것을 봤고, 오늘은 오원 가운데 세 번째, 책 수상행식이잖아요. 상원에 대해서 보려고 하는데, 이 얘기부터 해보죠.
갓난아기의 체험
여러분, 갓난아기를 안 거쳐온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우리가 처음 이 세상에 딱 태어났을 때는 누구나 갓난아기였어요. 그런데 갓난아기를 한번 보잔 말이죠. 갓난아기에게, 갓난아기의 눈동자를 이렇게 바라보면, 거기 뭐 세상 시름이 있겠습니까? 아기가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냥 그 아이가 그냥 이렇게 눈 뜨고 있을 뿐이에요. 뭐가 나타나든 그걸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아요. 그냥 보고, 저건 좋은 거, 저건 나쁜 거 이렇게 분별하지 않겠죠. 그냥 볼 뿐이고, 소리가 나면 들을 뿐이고, 그냥 그냥 그러고 있단 말이에요.
즉, 오취온, 우리가 오늘 사람은 오늘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착각, 착각을 자꾸 취한다는 거거든요. 쌓아둔다는 거거든요. 그걸 오취온이라 그래요. 즉, 몸이 내가 아닌데 갓난아기가 몸이 나야, 이런 생각이 있을까요? 이 몸이 내 몸이야, 이런 생각이 있을까요? 조금 큰 아이들조차 그림을 이렇게 그려놓고서요. 이런데 엄마한테, 엄마, 엄마, 이거 봐. 얘가 손이 그린 그림 좀 봐. 얘가 이렇게 그렸어, 이런다는 거예요. 내가 그렸다는 생각을 안 한대요. 손이 그렸다고, 이 손을 나라고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얘 좀 봐, 이런다는 거예요. 갓난아기들은 손, 지 손 이러면서 되게 신기하면서 눈동자 이렇게 막 신기하잖아요. 이 몸이 나다, 이런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처음에는. 또 몸이 나다라는 생각만 없을 뿐 아니라, 느낌, 느낌이 나다, 이런 생각이겠어요? 느낌이 그렇다고 해서 이 첫 번째 자리에 느낌 자체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근데 이거를 느낌으로 취해서 오취온으로 쌓아두는 일은 없단 말이에요. 그냥 통으로, 하나로 경험된단 말이죠.
즉, 갓난아기가 이렇게 있는데,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그냥 있다가 제가 오줌이나 똥을 쌌어요. 오줌이나 똥을 쌌으면 뭔가 모르게 이렇게 좀 느낌 이상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응애응애할 거 아니에요? 그냥 응애응애하는 거예요, 어떤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근데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내가 이것은 좋거나 싫거나, 아니면 이것은 똥이거나 오줌이거나, 이건 더러운 거라든지, 이런 생각이 있을까요? 똥은 더러운 거야, 그런 생각, 더러운 거니까 빨리 닦아줘, 이런 말을 안 한단 말이에요.
그냥 응애지. 마찬가지로 아이가 뭔가 만지다가 칼 같은 거를 잠깐 잘못 뱉다든지, 아니면 어디 세게 누가 떨어졌다든지 하면 통증을 느낀단 말이에요. 통증을 느끼면 이게 통증이라는 생각도 없고, 뭐 이런 거 없단 말이에요. 그냥 응애예요, 응애. 그리고 배고파도, 배가 고프면 뭔가 배고프다는 느낌이 일어날 거 아니겠어요? 근데 그걸 배고프다는 느낌이라고 몰라요, 아이들은. 그냥 응애한단 말이에요.
즉, 이게 뭔지를 분별할 줄은 몰라요. 분별할 줄은 모르는데,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에요. 안단. 말이에요. 근데 통으로 안뿐이에요, 그냥. 통증도 그냥 응애, 배고픔도 그냥 응애. 하나란 말이에요, 하나. 둘이 아니게 경험된단 말이에요. 그냥 이 경험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이게 안 믿는 건 아니에요. 알아차림이 없는 건 아닌데, 그걸 분별할 줄 모르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얘가 조금씩 나이를 들면서 엄마한테 배워요. 엄마가 그림책을 하나 가져와서, 그림 카드 앞에는 컵 그림이 그려져 있고, 뒤에는 컵이라고 글씨가 써 있는 걸 보여주면서 앞에 컵 그림을 보여주면서 '컵, 컵, 컵' 이러고, 또 뒤에 글씨를 보여주면서 '컵, 컵, 컵' 이런단 말이에요. 이거를 자꾸 하면 아이는 그다음부터 이거 비슷한 것만 보면 '컵, 컵, 컵' 이런단 말이죠. 그러면서 이제 언어, 개념이라는 게 분별이 시작되죠. 아! 이건 컵이구나.
또 엄마가 어떤 특정한 '컵'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컵, 컵, 컵' 하는데, '칼, 칼, 칼' 이래놓고, 칼을 보여줄 때마다 '안 돼, 안 돼' 이렇게 얘기를 하면, '아, 이거 나도 모르지만 뭔지 칼, 칼' 하는 거에는 왠지 모르게 엄마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니까 내가 칼 가까이 가면 안 되는 거구나 하고, 칼에 대해서 뭔가 모르게 안 좋은 느낌 같은 것들이 생성되겠죠. 이처럼 개념 짓는 작용 있잖아요.
대상을 보고 '이걸 컵이구나' 라고 개념 짓는 작용, 그것을 상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상온은 표상작용이라고 해요. 표상작용이라고 해서 그 대상을 식별하기 위해서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 '이것을 컵이구나.' 아, '이건 부처님이시구나. 부처님을 보니까 좋구나. 우리는 불자들 같으면 부처님을 보면' 자비롭고 편안하고 좋은, 이런 느낌이 일어나겠죠.
내 상온, 표상 속에는 부처님이 좋은 이미지로 이렇게 기억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또 다른 상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처님을 싫어하거나 그럴 수도 있겠죠. 그 사람에게는 표상이 다른 거예요. 이처럼 우리는 언어와 개념화 작용, 이런 것들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뿐만 아니라 좀 더 넓게 본다면 이렇게 표상작용뿐 아니라 비교, 판단, 또 추리, 총괄, 개념화하는 일체 모든 이성적인 사유, 생각 등을 전부 다 상온이라고 이름을 붙여요. 그런데 우리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단순화시켜서 수온 하면 느낌, 느낌, 감정, 상온 하면 생각, 개념, 이런 것들을 상온이라고 쉽게 설명을 해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상온을 가지고 세상 모든 것들을 이렇게 딱 이미지화해서 딱 사진 찍는 거예요.
컵 하면 컵이라는 것을 컵 카드를 보고서는 컵이라고 우리가 가슴속에 이렇게 딱 찍어 놓고 이것은 컵이구나 이렇게 알았듯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이렇게 그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거에 대한 이미지를 표상작용으로 마음속에 딱 찍어 놓고 나서는 그걸 컵이라고 알고 있어요. 제가 맨날 하는 말이듯이 우리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요.
세상을 표상작용, 표상작용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세상을 간접 경험해요 항상 누구나. 그래서 이 말과 언어에 우리는 오염되어 있다 보니까, 그 말과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간접 경험하는 거에요. 말이란 필터. 그래서 언어, 개념, 모양을 명상이라고 불러요. 이름과 모양. 그래서 그 이름을 기억해서 그 모양을 이름과 모양을 매칭시켜서 컵이라는 이름과 컵이라는 모양을 매칭시켜서 내 안에 컵을 인식하는 거예요.
이성적 사유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인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저마다 다 자기 식대로의 이미지를 사진 찍어서 그걸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못 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정견,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그게 해탈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표상작용으로써 상을 취해가지고 모양을 그려가지고 그 모양을 가지고 그것을 걸러서 본단 말이에요. 좋다고 나 나쁘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진실을 실상을 단 한 번도 못 봐요. 이렇게 표상으로써 걸러서 보는 마음, 그걸 허상이라고 해요. 헛된 망상 이렇게 불러요. 분별 망상 이렇게 불러요.
제가 정치 얘기를 종종 하는데 정치와 종교처럼 우리들 관념이에요.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게 잘 없거든요. 비유하기 제일 좋아요. 정치나 종교가. 멀쩡한 사람도 종교의 하나에 빠져버리면 대책 없이 빠져들어요. 상식이 안 먹혀요. 종교에 확 빠져버리면.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극단적인 보수, 극단적인 진보 다 만나봤거든요. 주변에 친한 사람 많거든요. 그런데 평소에는 멀쩡해요. 되게 지혜롭고 자상하고 참 좋은 사람이에요. 양쪽 다. 그런데 이 사람과 정치 얘기만 나왔다 하면 그 사람이 극단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제가 너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서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면 발끈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특정 정치색이나 특정 종교나 어떤 특정 견해에 취우쳐 있게 되면 그것도 이 종교는 이런 거고 보수는 이런 거고, 보수는 좋은 거야 라는 상을 내가 이렇게 취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 진보는 나쁜 거야라는 상을 취하고 있게 되면 세상을 그 필터로 걸러서 봐요. 그러니까 유튜브를 틀어도 보수는 극단적인 보수 채널만 주야장천 보고, 진보는 극단적인 진보 채널만 주야장천 보고 그렇게 보게 되면 자동 검색으로 그걸 강화시켜 주는 이 생각이 옳다는 것을 강화시켜 주고, 저 반대편이 틀렸다는 걸 강화시켜 주는 연관 영상들이 또 계속 뜬단 말이에요.
그럼 계속 그것만 보게 돼 있어요. 그러면 점점 더 그 상으로 취우친 견해가 점점 더 견고해지고, 그런 사람들 끼리끼리 댓글을 서로 보면서 '맞아 맞아, 내가 맞았어. 역시 내가 옳았어' 그걸 점점 더 강화시켜요.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 견해를 들어보자 일단은 이걸 못해요. 들어보나 마나 틀린 건데 뭐 하러 들어봐 시간 낭비하게 이렇게 한단 말이에요.
마음이 다 껴요. 내 견해, 내 표상과 딱 맞는 부류 유유상종으로 그 같은 결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만나요. 그러면 자기가 편협하게 취우쳐 있다는 사실을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요. 나는 지혜롭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틀렸고,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고, 나는 절대적으로 옳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세상을 보는 필터인 거예요. 저마다의. 그러니까 그 필터만 옳다고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필터를 가지고 정치도 보고 모든 정책도 보고 다 그 필터를 통해서 본단 말이에요.
특정 종교를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 그 종교적 필터를 가지고만 세상을 바라봐요. 종교라는 상에 중독이 돼버리면 제일 무섭잖아요. 옛날에 사이비 외도 같은데 잘못 취우 쳐버리면 여러분 종교가 무서운 이유는 여러분 다른 거에 취우 친다고 해서 그걸로 극단적으로는 선택을 안 하거든요. 예를 들면 종교에 취우 쳐버리면 그 교주가 우리는 지금 다 같이 죽으면 극락 간다. 그러면 진짜라고 믿어요. 천상 간다 이러면 진짜라고 믿어요.
그래서 옛날에 그런 사건 있었잖아요 우리나라에도. 그 종교 집단에서 교주가 다 같이 죽자. 그러나 아무나 못 죽는다. 다 같이 집단 자살을 해서 우리는 천국으로 간다. 근데 복이 없는 사람은 못 죽는다. 그래가지고 복 없는 같이 죽지 못할 만한 복 없는 사람들은 저쪽에 밀어넣고 너희들은 죽을 수 없어. 복이 없어서. 그리고 죽을 수 있는 사람만 천국 갈 사람만 내가 뽑아가지고 옥상에 들고 올라가 가지고 다 같이 집단 자살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안 죽었던 사람들이 너무 비참했대요. 내가 거기 못 간 것이 한이 됐대요. 나도 저기 가서 극락을 갔어야 되는데 천상을 갔어야 되는데 나는 저렇게 저 속에 들지 못한 내가 얼마나 복이 없으면 얼마나 그 분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적이 못 들었을까. 그래서 너무 비참했다는 거예요. 죽지 못한 게.
이게 뭐예요. 자기가 만들어놓은 표상이잖아요. 그게 옳다라는 상. 그거에 내가 딱 묶여있으면 헤어나지 못해요. 근데 그거 누가 만들었어요. 자기가 한 생각 일으켜서 만든 거 아니에요. 자기가 그걸 취한 거. 아니에요. 수없이 많은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데 그 견해 가운데 이 견해를 내가 쥔 거 아니에요. 누가 쥐었습니까. 자기가 쥐었어요. 자기가 붙잡은 상이예요.
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 표상이 있으면요. 내가 강렬한 표상으로 취하고 싶은 것들 있잖아요. 또 내식대로 취하는 것들만 눈에 띄기 시작해요.
자연에 대한 인식 변화
저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다크 관심이 없었어. 제 어린 날에는. 어릴 때 가장 이해 못 했던 게 어르신들이 봄에 꽃구경 간다고 그러고 가을에 단풍 구경을 간다는 거예요. 그것도 버스 대절 해가지고. 뭐지? 고개 들으면 다 여기 꽃이 있는데 뭔 꽃구경을 가지? 단풍 구경을 왜 가는 거지? 이해 못 했어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몰랐으니까. 산에 가는 건 더 이해 못했어요. 그 힘든 짓을 왜 하는 거지? 그랬단 말이죠.
저는 늘 자연이 제 주변에 있었는데도 그 자연은 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어요. 제 마음에는 다 강렬한 표상으로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 뜨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그냥 산에 있는 게, 산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산길을 걷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풀 한 폭의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숲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감동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막 중독이 돼가지고, 자연에 중독이 돼가지고 툭하면 지리산으로, 한라산으로, 설악산으로 다니고. 그래서 제가 히말라야까지 가고.
보세요. 분명히 자연은 저에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에게 없었어요. 있어도 없었어요. 여러분 학교 운동장에 가 있는단 말이에요. 아들 만나러 학교에 간단한 말이에요.
그 학교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진짜 있습니까? 내 마음속에 표상으로 딱 찍혀있는 내 아들, 내 자식, 혹은 내 자식과 친한 친구들 몇 명. 그 사람들만 나에게 중요도가 부여된 채 딱 표상으로 자리 앞에 있으니까 그들만 눈에 띄어요. 그리고 또 친구들 중에도 예를 들어, "저 친구는 좀 별로 안 좋은 친구라던데." 이런 얘기를 들었으면, 또 그 친구를 보자마자 안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말이에요.
그 필서를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게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을 본다고 보지만, 실제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또 있는 그대로를 못 보고 내 표상으로 걸러진 것만 봅니다. 전체를 못 보고. 뇌과학에서도, 실제 시각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예를 들어, 무한한 정보가 들어오는데 그 가운데 0.00000000 몇 퍼센트만 항상 똑같은 가능성만을 본다는 거예요.
여러분, 대문 앞에 있는 발밑에 어떤 작은 꽃이 피어있는지 아세요? 평생 못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거기를 봤더니 거기에 꽃이 피어있다는 걸 본 적이 있을 수 있어요. 평생을 20년을 살아도 거기에 있던 꽃은 나에게 없었던 거죠. 여러분, 저는 그 얘기하는 분 많이 봤어요.
제가 옛날에 전라도 광주에서 살 때 어떤 분이 제가 광주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에 주주로 있을 때 바로 앞에 사는 분이신데, 제가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에 있는 절에 있을 때 서울까지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면서 스님이 여기 주주로 계실 때는 전혀 불교에는 관심도 없었고 종교에조차 관심도 없었고, 스님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봤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없다는 말이에요 자기에게. 자기 마음이 없는 거예요. 불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불교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유튜브를 보다가 알았대요.
그러다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보니까 옛날에 문 앞에 있던 스님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늘 있어도 내가 보지 않으면 그건 없는 거예요.